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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밥 먹여주는 경제경영

출판시장의 니치마켓 줌맨스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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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포르노 소설이라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만들어 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화제이다. (조선일보는 대단한 신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신문이다.) 10대 소녀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로맨스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출판분야 가운데 연애소설이 틈새시장이 도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보자. 6년 전 인터넷 마켓이 이슈로 태동하던 시기에 니치마켓 또는 캐즘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지금도 유효하지만...) 그 유행으로 출간된 《인터넷에서 찾는 틈새시장》에서 '출판'에 관한 부분이다.

연애소설은 슈퍼마켓, 공원 가판점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판매된다. 연애소설의 표지를 보면 한결같이 남녀 주인공이 사랑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어김없이 백인이다. 미시시피주 콜럼버스에 있는 제네시스 프레스의 경영자인 월 컬럼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미국인을 겨냥한 연애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서점에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연애소설이 전혀 없다고 평소에 부인이 불만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흑인이 주인공인 로맨스소설, 생각할 수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의 인구수를 생각한다면 니치마켓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장이다. 왜 로맨스소설에는 백인만 표지를 장식하고 주인공이어야 하는가. 흑인이 표지모델이고 주인공인 로맨스소설이 있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된다.

이 연장선으로 로맨스소설은 왜 10대 여자아이만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가. 그들보다 돈도 있고 안정적이며 구매력이 더 좋은 아줌마가 읽을 로맨스소설은 없는가. 10대가 아닌 다른 대상을 위한 로맨스소설이 있어야만 할 이유이다. 10대가 읽는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이면 더욱 좋다. 성행위가 노골적이지 않지만 (사실 노골적이면 더 좋고) 꼭 들어있어야 한다. 그것도 자주. 아줌마가 읽는다고 주인공이 아줌마나 나이가 들면 안 된다. 내 나이를 잊고자 읽는 것인데 주인공이 자기 또래라면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서 짜릿한 감흥보다는 자괴감에 빠질 우려가 더욱 크다. 따라서 주인공은 젊어야 한다.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을 읽지 않았다. 독자층을 말하는 '엄마 포르노'라는 말에서 이 책이 독자를 유혹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3개월간 3천만 부가 팔렸다. 한국과는 수요량이 다르지만 대단한 양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출판에도 니치마켓이 존재함을 증명해주는 장르소설이다. 아줌마로맨스소설, 즉 줌맨스소설이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새로운 장르 줌맨스소설(아줌마로맨스소설)이 열렸음을 보여준다. '약간 위험하고 도발적인 사랑'이 아니라 '좀 더 위험하고 좀 더 자극적이며 좀 더 도발적인 사랑' 이야기는 이 책으로 탄력받아 팔리지 않을까.



덧_
알리딘 소설 MD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소개글을 읽고 출판분야 니치마켓의 블랙로맨스소설이 떠올랐다. 엄마-언니에게는 "... 그게 한낱 꿈이라도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


남자 주인공은 27세, 여자 주인공은 21세. 한창 불장난 좋아할 만한 두 남녀의 육체적 밀당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왜 동갑내기가 아닌 40대 여성들일까. <그레이>는 아침 드라마들을 불륜 꽃밭으로 만들고(얼룩진다는 표현은 아침 드라마를 얕보는 표현이다) 좀 더 예쁜 주말 등산복을 찾는 중년 여성들을 위한 <트와일라잇>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이>는 주말에 등산조차 가기 어려워서 티비 리모콘이나 겨우 돌리는 엄마(또는 동년배의 미혼 여성)들을 위한 작품이다.

엄마-언니들에게는 에드워드보다 그레이가 낫다. 뱀파이어라고? 불노불사에 싸움 잘해봐야 뭐하겠는가. 그레이의 초능력이야말로 진정 매력적이다. 바로 ‘생활에 쫓기지 않는’ 능력이다. ‘죽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탐독하는 사춘기 딸은 그레이의 초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깨에 들러붙은 인생의 노곤함을 떨칠 수 없는 언니들만이 그레이의 마법에 걸려든다. 사랑은 때로 괴로운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니까 다른 거 다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남자가 소설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상대의 옷보다 먼저 생활을 벗길 줄 아는 이 남자와 함께라면, 그게 한낱 꿈이라도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말이다.
- 알라딘 소설 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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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퀸으로 대표되는 로맨스소설의 수요는 늘 있었고 관능소설 출간이 처음도 아닌 지금, ‘50가지 그림자 시리즈’가 세계 여성 독자를 강력하게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이 성(性)을 즐기는 것이 신드롬이 되어버린 건 여전히 억압받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반증’, ‘가정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남성과의 경쟁에서 끊임없이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알파걸들이 그 피로를 달래려 읽는 책’,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전율과 전통적 로맨스 코드가 주는 안도감의 조화’ 등 사회 각층에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소비하고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 남자를 사랑이 구원한다. 세상을 모르던 여자가 사랑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사랑을 통해 결점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해 변화하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울림이 있다. 수없이 반복되어도 여전히 읽히는 강력한 서사이고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원한다. ‘회색’에도 50가지 다른 톤의 색이 존재할 수 있듯이 똑같은 사랑 이야기에도 여러 가지 빛깔이 있다.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제각각 다른 색깔을 지닌 이야기들 중에서 약간 위험하고 도발적인 사랑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것이며 이는 3천만 독자들이 증명한 바 있다. 모든 이에게 같을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는 사랑, 거기에는 온화하고 밝은 빛부터 어둡고 위험한 빛까지 다양한 색조가 존재한다.
_출판사 책소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1~2권 세트 - 전2권
E L 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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