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行間/새로 나온 책

2014년 10월 5주 새로 나온 책

반응형


제국주의가 아시아-아프리카 대륙을 약탈하던 19세기도 아닌 21세기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다. 1948년 그 당시까지만 해도 지도상에 없던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탄생시킨 이래로 지난 66년 동안 온갖 인권 침해를 저질러온 탓에 '중동의 깡패 국가'라는 이름을 얻은 지 오래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건국 이념으로 내세우는 시오니즘(Zionism)은 배타적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한 표본이라 비난 받는다.

시오니즘 국가 폭력은 현재 진행형

시오니즘을 앞세운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 앞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해마다 많은 사상자를 내왔다.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피눈물을 흘렸다. 유엔 인도주의조정국(UNOCHA, 1972년 발족)의 최근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4년 7월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공격으로 숨진 사람은 모두 2104명에 이른다. 이들 사망자 10명 가운데 7명, 정확히는 69퍼센트가 비무장 민간인들이다(민간인 희생자는 1462명으로 이 가운데 어린이는 495명, 여성은 253명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 분쟁은 포연이 그치자마자 '통계 전쟁'으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쪽은 사망자 통계 가운데 민간인 비율이 높은 것은 이스라엘이 민간인 주거 지역을 마구잡이로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부 세계에 알려지는 팔레스타인 사망자 통계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NGO) 요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정확하지 않으며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망자 숫자도 논란거리지만, 사망자 속에 얼마만큼의 무장대원이 포함돼 있느냐 하는 것도 논란이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죽인 많은 테러분자들이 민간인 희생자로 분류됐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강경파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도 "우리는 약 1000명의 테러리스트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민간인 희생자 비율은 52퍼센트쯤으로 떨어진다. 네타냐후의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가자 지구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1000명이 넘는 셈이다.

북 리뷰의 앞머리에 팔레스타인 희생자 통계를 언급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시오니즘에 따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로 지난 66년 동안 줄곧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물을 강요하는 국가 폭력이 현재 진행형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새삼 짚어보기 위해서다.

"중립적일 수가 없다"

일본 여성인 다나미 아오에(일본 세이케이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주임연구원)의 <이스라엘에는 누가 사는가>(현암사, 2014년 9월 펴냄)도 이스라엘의 건국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 및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아래처럼 정확히 선을 긋는다.

이 책은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비판하는 자세를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이나 중립'을 좋아하는 독자로부터 경원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별적이고 인권 억압적인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그려내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차별이나 인권 억압에 가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15쪽)

위의 글은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한 대목을 떠올린다. 다른 많은 중동 관련 책에 견주어 이 책의 두드러진 강점은 중동 현지 사회 안으로 바짝 다가간 저자 나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4년(시리아 2년, 이스라엘 2년)에 걸쳐 중동 지역에 머무는 동안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익히고, 키부츠를 비롯한 이스라엘 사회에 밀착해 들어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을 담아냈다. 그저 길어야 한두 달 동안 중동을 다녀온 뒤 써내려간 여행기 수준의 글과는 다른 내공을 보인다.

학살의 기억 잊힌 예술가촌

이 책은 곳곳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지중해변에 자리한 이스라엘 북부 도시 하이파에서 가까운 이스라엘의 한 마을을 방문하고 느낌 소감을 쓴 대목이다.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 '아인하우드'라 부르던 그 마을에서도 1948년 학살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땅과 집을 잃었다. 유대인들은 '부재자재산관리법'(1950년)에 따라 땅과 주택을 나누어 가졌다.

6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팔레스타인 '아인하우드' 마을은 '에인호드 예술가촌'이란 이름으로 관광지처럼 바뀌었다. 저자는 그곳에서 관광 상품용 비누 가게를 꾸려가는 한 상냥한 네덜란드 게이 청년을 만난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만난 유대인 파트너를 따라와 그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다른 부류의 정착민(settler)이다.

온화하고 멋진 남성이었다. 잠깐 서서 얘기를 나눴지만 헤어질 때는, "오늘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마 잊지 못할 거예요"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혼자가 되자 아주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네덜란드의 젊은 남성이 우연히 마음에 맞는 이스라엘 청년을 만나 애인이 되었고 이 마을에 살게 되었다. 그와 이 마을이 경험한 역사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시오니즘)에 관한 책임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문제인 것이다. 유대인 파트너가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원래 이 나라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에게는 이 마을에 살 권리가 있는데, 원래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아랍인은 이 마을에 두고 온 재산까지 몽땅 빼앗기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부재자' 상태로 있는 것이다. (302∼303쪽)

아랍의 흔적 지우는 '문화 폭력'

저자는 팔레스타인 마을 '아인하우드'에서 지난날 피의 학살 기억을 지우고 유대인의 '에인호드 예술가촌'으로 바꾸었듯이,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인의 역사를 빼앗아 그것을 관광지에서 동양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타자(他者)로 종속시키려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중해변의 오랜 도시 아카도 위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중세 십자군전쟁 때의 성벽과 유적지들이 남아 있는 아카는 1947년 유엔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을 냈을 때 아랍 쪽에 편입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맹공을 퍼부어 도시를 점령했고, 그 뒤 도시 전체를 관광 도시처럼 바꾸었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십자군 자체는 유대교적 정체성의 확인과는 관계없지만 '십자군의 도시'를 강조함으로써 아랍의 역사를 부재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랍 측이 십자군에 의해 받은 엄청난 피해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아랍의 땅이 침략 당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무시되었다. 게다가 이곳이 '유대인의 도시'로서 번영한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는데도 박물관에 인접하여 새롭게 개점한 토산물 가게에는 금빛과 은빛으로 시선을 끄는 유대교 관련 상품만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279쪽)

유대인들은 아카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의도적으로 도시 곳곳의 아랍 흔적을 지워나갔다. 이를테면 오스만제국 시대에 세워진 커다란 시계탑의 문자판 숫자를 유대인의 히브리 문자로 바꿔버리는 따위다. 저자는 이를 '문화적 폭력'이라 규정한다.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나 가자 지구에서 노골적인 '군사적 폭력'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속 보이는 과거사 왜곡이 이스라엘 점령지 곳곳에서 '문화적 폭력' 형태로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스라엘의 '2등 시민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지닌 아랍인들(팔레스타인 원주민으로 이스라엘에 편입된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에 2년가량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시민권자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만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아웃사이더로 차별에 따른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가는 2등 시민들이다.

이스라엘 인구는 780만 명(2012년 현재)으로 유대인 585만 명(75.1퍼센트), 아랍계 주민 195만 명(24.9퍼센트)으로 나뉜다. 4명 가운데 1명이 아랍인, 즉 팔레스타인계 주민이다. 유대인들은 자국 시민권을 지닌 195만 명의 아랍인들이 언젠가는 대규모 폭동으로 국가의 근본을 흔들지도 모른다는 걱정들을 품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다비드 벤구리온(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초대 총리)는 이스라엘 아랍인들을 가리켜 흔히 '첩자' 또는 '스파이'를 뜻하는 '제5열'이라 불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국방 의무조차 지우지 않는다. 아랍인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이들의 손에 총을 쥐어줘선 안 된다는 발상에서다.

이스라엘 안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나 가자 지구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지가 낫다고 비칠 수도 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이스라엘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차별 정책은 노골적이라고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아랍인은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류로부터 배제된 존재다. 국영 기업에는 고용될 수 없고, 관청의 고위직 공무원의 경우에도 아랍인 관할 등 극히 제한된 분야에만 허락된다. (…) 군대에 가지 않기 때문에 병역을 마친 후에 받게 되는 각종 복지 혜택의 주체도 될 수 없고, 이들의 높은 실업률은 다양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낳고 있다. (257∼258쪽)

사막을 옥토로, 유대인 신화의 그늘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는 아랍인 농부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세워지기 전에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그리 풍족하진 않았어도 땅에 바탕을 두고 자급자족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들어서면서 땅을 빼앗기고 이스라엘 농장에 고용돼 품을 파는 처지가 되거나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전락했다. 유대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척박한 땅에 무허가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려 해도 그곳엔 '물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으며 우편 서비스도 받지 못하고 전화선도 깔려 있지 않다.' (292쪽)

특히 물 문제가 심각하다. 유대인들은 물을 독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현지 취재 때 음식점에서 손을 씻으려 화장실로 가니 물이 나오질 않았다. 이스라엘이 수도관을 잠가버린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타는 목마름에 익숙해 있다. 손이야 안 씻어도 그만일지 모르지만, 농업용수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저자는 유대인들이 사막을 옥토로 바꾸었다는 신화는 폭력적인 물 독점과 관련이 있음을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사막을 녹색으로 바꾼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실제로 만들어냈으며 갖가지 특허도 얻었다. 동시에 그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북부의 헤르몬 산 수원이나 요르단 계곡의 체수층(滯水層)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원래 주민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입식자에게는 싸게 제공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수원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몇 시간이나 걸려 물을 길으러 가거나 비위생적인 물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바로 몇 킬로미터, 수백 미터 옆에서는 풍부한 물을 빨아들이며 싱싱한 감귤류가 자라고 있다. 맛있으면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160∼161쪽)

이스라엘이 민주 국가? 깡패 국가!

아랍인들을 차별하고 물을 독점한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유대인들이 가리고 싶어 하는 21세기 깡패 국가의 민낯이 드러난다. 교과서적인 서구 민주주의의 잣대로 중동 정치 상황을 잰다면, 중동 국가들은 대부분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해마다 30억 달러의 군사 원조로)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펴는 미국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오직 하나뿐인 민주 국가"라고 강조한다.

한 국가가 참으로 민주 국가냐 아니냐를 국내 정치 제도의 형식적 운용 체계만으로 판별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독재 국가들도 겉으론 민주주의를 내세운다. 외형만 갖고 민주주의 여부를 판단한다면,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 따져볼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스라엘 국내 상황이 민주적이지 못하다. 이스라엘의 민주주의가 과연 모든 구성원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고 인권을 존중하느냐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195만 명의 아랍계 시민들은 2등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느끼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지수는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이스라엘에 대해 매기는 '완전한 자유 국가'라는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둘째, 이스라엘 대외 관계가 민주적이지 못하다. 요점은 한 국가가 이웃 국가들과 민주적 호혜 평등의 국제 관계를 갖느냐, 아니면 신식민주의적 패권 정책을 펴나가는가 하는 측면이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21세기에 식민지를 두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제1차 중동전쟁), 1967년(제3차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령 골란고원, 남부 레바논을 점령해 식민지로 삼고, 걸핏하면 레바논을 침공함으로써 군국주의 깡패 국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스라엘 정부의 의도적인 차별에서 오는 불이익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 '2등 시민'의 얼굴에서 일본인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떠올린다. 지난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과 지금의 일본을 이스라엘에 견준 사려 깊은 대목 하나를 옮기면서 리뷰를 마친다. (결론은? 프레시안 독자들의 일독을 강추!)

이스라엘 국내에 사는 아랍인 사회를 관찰하고 조사할 때는 항상 일본이 한반도 사람들에게 해온 일, 그리고 현재 재일 한국·조선인들이나 그 사회의 양상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를 강요당한 부모 세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그럼에도 자신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일본어인 데서 오는 고통과 원한을 다양하게 표현해온 재일 한국·조선인 2세 시인이나 작가들의 말에 강한 인상을 받아온 필자로서는 이스라엘의 아랍인들이 얼핏 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지배자의 언어인 헤브라이어를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과 위화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8쪽)

이스라엘에는 누가 사는가
다나미 아오에 지음, 송태욱 옮김/현암사

위대한 유대인? 피범벅 깡패 국가의 추악한 민낯

+

이 사전은 1880년대 이후 일본어에서 우리말에 들어온 어휘 3,634 단어를 조사, 검증하여 수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외래 어휘 가운데는 일본어 어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단어(單語)’란 낱말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중국인가 한국인가, 아니면 일본인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조사에 의하면 ‘단어’란 말은 일본에서 영어 word의 번역어로 성립된 말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용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95년 대한제국의 <관보>에서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우리말의 한자로 음독이 가능한 일본어 어휘는 해방 이후 순화 대상에서 제외돼 현재 우리말화 되어 있다. ‘과학, 철학, 미술’ 등과 ‘대통령, 검사’ 등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어휘들의 예를 개화기 소설과 신문, 잡지 등 100여 종 이상의 자료를 수집하여 면밀하게 비교, 검증하였고, 이 사전의 수록어로 삼았다. 한 나라에서 쓰이며 소통과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말(어휘)의 뿌리를 찾는다는 것, 그것이 궁핍한 과거사에 닿아 있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각성을 통한 공동체 지성의 새로운 진일보를 의미할 것이다.

*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을 뜻하는 ‘사회’(社會)라는 말은 중국 고전 <근사록>에 나오는 말이지만, 그 뜻이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사회’는 근대 일본에서 영어 소사이어티(society)의 번역어로 만든 것이다. 19세기 말 한국, 중국으로 전파됐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예는 1895년 6월5일치 <관보>(제78호 ‘외보’)에서 확인된다. “일백만법을 증가하며 외국사회에 계한 계약서인지세를 증과하야…”(원문의 단어들은 한자)

이한섭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명예교수가 수십년 각고 끝에 최근 출간한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고려대학교출판부 펴냄)에는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3634개가 그 내력과 함께 수록돼 있다. 수록방식은 먼저 표제어, 표제어에 대한 간단한 사전적 의미, 4개 안팎의 용례, 어원, 각국 관련` 연구정보 등 참고 순으로 돼 있다. 이 사전 최대의 특장점이자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게 용례인데, 일본어가 우리말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1880년대 이후 관보, 신문, 잡지, 책 등 각종 문헌들의 관련 부분 원문들을 그대로 발췌해서 실었다.

대통령, 헌법, 검사, 판사, 경찰관, 과학, 철학, 물리, 도서관, 박물관, 오방떡, 융자, 팔방미인, 광고, 승강기, 연애, 모험, 전망….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근대 문물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고 식민지배까지 당했으니 피할 수 없었다. 광복 뒤 우리말 찾기 운동 등을 통해 노가다(막일, 막일꾼), 쓰메키리(손톱깎이)처럼 형태부터 일본어임이 분명한 어휘들은 대부분 퇴출됐지만 일본어에서 들어온 어휘의 80% 이상인 한자어들(그 중의 99.23%는 우리말 발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교수는 이처럼 많은 어휘들이 일본어에서 온 것이라는 게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겠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어떤 단어가 일본어에서 온 것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은 그런 면에서도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그 사실을 아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본다. “지금은 거의가 우리말 어휘 속에 녹아들어 나름대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이제는 이들 어휘를 영어나 중국어에서 온 말과 같이 외래어의 일부로 보아도 될 시점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
이한섭 지음/고려대학교출판부

‘대통령’이 일본어에서 왔다고?

+

눈치 빠른 사람은 안다. 우리는 어디서 무얼 하든 알고리즘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리즘은 우리의 연애 상대를 골라주고, 과속 차량에 딱지를 끊고, 이번 주말에 볼 영화를 추천하고, 가끔 일자리를 뺏는다.

수시로 바뀌는 사람의 기분, 생각, 몸의 상태를 공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말에 점잖은 인문주의자들은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인간의 거대한 심연을 살짝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컴퓨터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책 제목인 ‘만물의 공식’은 알고리즘이 현대인의 삶을 넓은 범위에서 규정, 재편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0세기의 사회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세상을 공식으로 이해하려는 욕망을 ‘질서 의지(will-to-order)’라고 표현했다. 현대 정보통신업계 거물들은 만물에 적용되는 공식을 고안해 이를 인간의 삶에 적용한다. ‘만물의 공식’을 따르는 이들은 인간이 그리 복잡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는다. 사람의 행동 패턴에 대한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적용할 공식이 있으면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데이터는 어디서 구하느냐고? 우리 스스로 제공한다.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자기 수량화’하고 있다. 얼마 전 공개된 애플 워치를 보자. 애플 워치는 착용한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서있고 걷고 뛰었는지 측정한다. 그에 따라 얼마만큼의 칼로리가 소비됐는지, 앞으로 얼마만큼의 칼로리를 소비해야 할지 알려준다. 애플의 알고리즘은 고객의 건강을 염려한다.

구글에는 ‘인간 분석팀’이 있다. 이들의 임무는 직원들의 행복을 수량화하는 것이다. 구글은 진미가 나오는 구내식당, 눈이 휘둥그레지는 오락시설 등의 사원 복지로 유명하다. 구글 인간 분석팀은 이러한 복지 혜택이 직원들의 행복도를 얼마나 높이는지 꼼꼼히 분석한다. 구글식 복지의 본질은 “인간의 노동과 사고는 효율성 증가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테일러주의에 닿아 있다.

저자는 알고리즘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다양한 사례로 보여준다. ‘컴생연분’이라는 재치있는 번역 제목이 붙은 장에서는 알고리즘이 사람과 사람의 연을 맺어주는 풍경을 묘사한다. 1967년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수십년간 결혼 상담가로 일한 닐 클라크 워럭은 양적 분석을 통해 결혼관계의 질을 파악해왔다. 결혼생활에 만족하는 부부, 불만 있는 부부 수백쌍을 조사한 뒤 이들의 궁합을 예측하는 요인을 밝혀냈다. 2000년 인터넷 결혼정보회사를 설립한 그는 가입자들의 성격을 검사한 뒤 궁합이 맞는 남녀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전까지 결혼정보 사이트는 가입자가 상대의 프로필을 읽은 뒤 접촉하는 형태였으나 이제는 알고리즘이 중매쟁이로 나선 것이다. 지금까지 이 회사를 통해 결혼한 이들은 60만쌍에 이른다.

통계를 활용한 치안 유지 방법은 이미 도입됐다. 범죄는 여러 곳에서 무작위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 특정 우범지대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UCLA 연구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80년간 일어난 1300만건의 범죄 통계를 활용해 지역별 범죄 발생 확률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경찰관들은 순찰을 시작하기 전 각자 지도를 전달받았다. 0.15㎢ 구역을 표시하는 사각형으로 구획된 이 지도에는 범죄 발생 확률이 높은 지역과 가능성 있는 범죄 유형이 표시돼 있었다. 시범 운영 결과, 범죄율은 36% 낮아졌다.

예술 영역은 어떨까. 영화계에선 “흥행은 신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이제 알고리즘이 흥행을 예측한다. 영국의 에퍼고직스사는 3007만3680가지의 평가 기준을 통해 박스오피스 수익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기준에는 뚜렷한 성격의 악당이 있는지, 약방의 감초 같은 조연이 있는지 등의 질문이 포함돼있다. 할리우드의 한 영화사가 개봉 직전인 영화 9편의 각본을 에퍼고직스사에 보내 평가한 결과 6편의 흥행 성적을 정확히 맞혔다. 스트리밍 미디어 기업 넷플릭스는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한 장면도 보지 않은 채 두 시즌, 26개의 에피소드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2500만 이용자의 데이터에 기반한 알고리즘을 갖고 있었고, 이 알고리즘은 <하우스 오브 카드>가 성공하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전통의 유료 케이블 텔레비전 HBO가 에미상에 첫 노미네이트되는 데는 25년 걸렸지만, 넷플릭스는 <하우스 오브 카드>로 6개월 만에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알고리즘이 바꿀 인류의 미래를 신나게 이야기했지만,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이 대체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늘어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전성기의 코닥 직원은 14만명이었지만, 디지털 사진의 대표 주자인 인스타그램의 직원은 페이스북에 인수될 당시 단 13명이었다. 정원사, 호텔 안내원, 요리사 같은 직업은 안전하지만 주식 분석가, 가석방 심사위원 등의 일자리는 알고리즘이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알고리즘을 둘러싼 ‘객관성의 신화’다. 인터넷 이론가들은 알고리즘이 인간적인 왜곡, 편견이 없는 평등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러나 알고리즘 개발 과정에 편견이 개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버드 출신의 흑인 박사 라타냐 스위니는 구글을 검색하다가 “체포되신 적이 있나요”라는 광고 문구가 표시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구글은 흑인의 전형적 이름을 가진 이용자를 체포 기록 광고와 연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알고리즘의 처분에 어떤 편견, 왜곡, 사실 오류가 있는지 밝혀낼 재간이 없다. 의사결정 과정 자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최종 통보만 받는 상황, 즉 카프카적 악몽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들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을 수도, 검색 엔진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문학비평가 조너선 갓셜의 말을 새겨들을 만하다. “문화연구는 과학과 더 비슷해져야 한다. (…) 앎의 불가능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절망할 것이 아니라 과학의 지적 낙관주의를 껴안아야 한다.”

만물의 공식
루크 도멜 지음, 노승영 옮김/반니

사랑까지 수량화하는 알고리즘의 세계
알고리즘은 알고 있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할지

+

반응형